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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일기

[박변호사의 기후칼럼 8] 커피와 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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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이면 시애틀 사람들에게서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데도 우산을 쓰고 다니지 않는다. 그렇다고 비옷을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다. 더욱 이상하게도, 비를 맞더라도 뚜껑이 달린 기다란 커피 잔을 손에 들고 다닌다. 패션의 온전함을 소중히 여기는 한국 사람으로서는 의아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우산을 들고 다니는 일이 귀찮아서일까? 아니면 커피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서일까?

시애틀 사람들이 커피를 좋아하는 것은 확실하다. 아침 일찍 와싱턴대학교 교정에 나서보면, 학생들 손에서 책이 들려 있는게 아니라 커피 잔이 들려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커피 잔을 들 수 있도록 손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은 아닌지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해 보기도 한다.

시애틀 사람들이 얼마나 커피를 가까이하는지는 거리에서도 쉽게 확인한다. 어진간한 쇼핑몰에는 커피전문매장이 빠지지 않고 있고, 시애틀 항구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 1호점은 스타벅스 체인점의 발상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루 종일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별로 없다. 시애틀에서 발상한 몇몇 커피체인점들은 세계 각국에 진출하여 세계인의 입을 사로잡고 있기도 하다. 한국의 스타벅스 매장 수가 최근 310개에 이르렀다니 한국인들에게도 시애틀 커피는 매우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773년 보스턴에서 영국의 식민지 과세정책에 저항하면서 일으킨 Boston Tea Party 사건 이후로 미국인들은 차보다는 커피를 애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스턴의 정반대편에 있는 시애틀 사람들이 커피를 끔찍이도 좋아하게 되었고 세계인들에게 커피를 적극적으로 권하게 되었을까? 시애틀에서 커피의 재료인 원두가 생산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커피원두는 주로 아열대 기후에 속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에서 생산된다.

힌트는 기후에 있다. 시애틀 겨울은 우기에 해당한다. 1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는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 지속된다. 일조량이 부족하게 되면 사람들의 마음도 어두워진다. 그래서 겨울밤이 긴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는 일부러 인공 빛을 쬐기도 하는데, 시애틀에서는 어두워진 마음을 커피로 달랜다고 한다. 향기롭고 달콤한 커피가 몸에 들어가면 포아진 혈중 당농도와 카페인의 각성효과가 축 늘어진 마음을 일으켜 세워준다. 생화학적 효과야 잘 모르겠지만 심리적인 효과는 확실히 있는 것 같다. 이처럼 커피는 시애틀의 길고 어두운 겨울 기후에 적응하는 수단이 되었다.

너무 일찍 시작하는 일과 때문에(아침 7시까지 등교해야 하는 고등학생을 데려다주기 위해서는 적어도 6시에 기상을 해아한다) 너무 빨리 지친 나의 심신에게는 아침에 들이키는 Cafe Latte 한 잔이 상당한 위로가 된다는 점을 실감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커피에 중독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우가 생기기도 하나 나도 시애틀 기후에 적응하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비가 계속하여 온다는데 왜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다니는 것일까? 이러한 현상도 시애틀의 기후와 깊은 관련이 있다. 비가 한꺼번에 많이 내리지 않고 부슬부슬 하루 종일 내리기 때문에 어리간하면 그냥 맞고 다니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맛(커피)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여 멋(옷)에 대하여는 신경쓰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새로운 기후현상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부스부슬 내리던 비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예가 잦아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애틀의 아침거리 풍경도 달라질 것이다. 머지않아 커피 잔과 우산이 사람의 손을 하나씩 차지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커피 향과 맛이 코와 입을 사로잡는다고 하더라도 온몸을 적시는 빗물 앞에서도 우산을 버리고 커피 잔만을 들고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손에 커피 잔을, 다른 한 손에 우산을 들고 가면 뒤뚱거리며 걷지 않을 수 없다. 발걸음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한 손이라도 움직여 줘야 하는데 두 손 다 물건을 들고 있으니 발걸음의 품새가 조금은 어색해질 것이다. 혹자는 우기에는 보기 어려운 햇빛이 요즈음 자주 보이는 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커피와는 작별을 고하고 우산만이 사람들 손에 들려 있을 수도 있다.

커피와 우산을 둘러싼 시애틀 사람들의 생활태도에서 기후변화가 우리의 생활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안락함과 편리함을 추구하면서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계속하여 편리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기후변화라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야 생활의 불편함이 조금이라도 덜 할 테니까.

-글을 쓰신 박덕희 변호사님은 광주환경운동연합 회원이십니다-